‘열두 번째 용의자’, 스릴러로 포장된 영리한 애국가
‘열두 번째 용의자’, 스릴러로 포장된 영리한 애국가
  • 유진모
  • 승인 2019.10.01 0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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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정의로운 세상에 살고 있을까? 학교와 책에서 배운 이성과 선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을까? ‘열두 번째 용의자’(고명성 감독)는 왜 영화의 다양성이 중요한지, 언론 등 매체의 투명한 활성화가 민주주의에서 필수인지, 과거의 청산과 올바른 역사 수업이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지 보여준다.

해방된 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953년 가을. 문인, 화가 등 예술인들이 모이는 명동의 오리엔타르 다방. 언제나 그렇듯 시인, 화가, 교수 등이 모여 저마다 사연들을 털어놓는데 일찍 거나해진 화가 병홍이 들어와 동료 인섭 앞에 앉는다. 병홍은 시인 두환이 남산에서 피살됐다고 전한다.

이를 놓고 갑론을박하는데 육군 특무부대 상사(김상경)가 들어온다. 그는 아주 점잖은 태도에 예의 바른 말투로 두환의 피살 사건에 대해 조사를 시작한다. 다방은 다른 예술인들처럼 두환에게 단골집이었고, 현재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용의자였다. 특히 두환의 라이벌 행출이 유력자로 지목된다.

상사는 용의자들에게 알리바이를 요구하고, 각자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듯한 예술가들과 다방 주인 석현과 선화 부부는 저마다의 알리바이를 제시한다. 상사는 두환이 총살됐고, 현장에서 젊은 문인 지망생 유정 역시 총살당한 채 발견됐다며 증거물인 소련제 권총을 꺼낸 뒤 그걸 아냐고 일일이 묻는다.

 

카메라의 미세한 이동만 있을 뿐 다방 안에서 거의 모든 시퀀스가 이뤄지는 형식은 지극히 연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반까지 지향하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장르적 형식은 스타일리시하다. 다방은 장르의 고전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을 다분히 의식한 듯하면서도 친일파의 의미도 담겨있다.

처음엔 두환의 살인범이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재미를 주고, 유정이라는 미모의 여대생이 등장함으로써 치정의 관능적 엿보기 심리가 요동친다. 그러나 이 모든 떡밥은 마르크스적 유물론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상사는 모든 용의자들의 부역 혐의를 주장하며 그들의 죄를 묻는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빼앗겼을 때 이 다방엔 북한군 장교들이 들락거렸고, 문제의 권총은 그중 한 명이 흘리고 간 것이었다. 어떤 예술인은 북한군에게 밥을 먹였고, 한 교수는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했다. 이즈음 그 지겨운 빨갱이논쟁이 시작된다. 이 영화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열강의 헤게모니 싸움과 그에 휘말려 어설픈 이념 대결로 대의명분을 망각한 권력욕이 낳은 민족적 비극이다. 다수의 국민에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 무장은 강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살고 싶었고, 가족을 지키고 싶었을 뿐 친미도 친소도 의미 없었다.

 

이 영화는 해방된 지 8, 한국전쟁 휴전 후 3개월 즈음이 배경이다. 무질서와 몰상식이 혼재된 혼돈의 시대다. ‘미국은 좋은 나라, 소련은 나쁜 놈의 극렬한 이분법만 있을 뿐 올바른 사상의 토론과 이념의 논의가 있을 리 없는 암흑기. 이승만을 국부라 추앙하면 옳고, 조금이라도 반대하면 빨갱이다.

그래서 초반에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거론된다. 보들레르는 환갑의 환속한 사제 출신 아버지와 34살 연하의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1848년의 2월혁명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생 자체를 저주라 여겼다. 불건전한 데카당스와 우울한 댄디즘이자 문학의 쇼펜하우어였다.

전후 한국은 모든 게 불안정했듯 문화와 지식도 혼란스러웠다. 일제강점기와 서구문화의 홍수가 겹쳐 고유의 문화의 의식이 흔들렸다. 지금은 프랑스지만 당시엔 불란서라 했다. 중국인조차도 그렇게 발음하지 않는 불란서. 이런 상황처럼 지적인 척하는 댄디즘이 성행했지만 정작 지혜는 부재했다.

한자의 한국식 발음인 가배라 부르던 커피의 맛도 효능도 모른 채 우리를 해방시켜준 선진국 미국이 버릇처럼 즐기니까 흉내 내기 위해 마셨듯 우리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몰랐고, 그 전에 일제의 청산조차 못했다. 이 영화가 강렬한 건 빨갱이보다 친일파가 득세한 걸 날카롭게 지적하는 지점이다.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던 두환은 일제강점기 때 어린 소년까지 일제의 희생양으로 내세웠고, 그 죄책감에 의한 회한과 고통에 시달렸다. 유정은 당시의 댄디즘이 만든 겉치레에 집착하는 어중이떠중이 지식인이 아니라 깬 지성으로 과거의 청산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자 했던 프롤레타리아트였다.

석현은 다리를 전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자금을 대준 죄로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에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립은 됐지만 그 일경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한국 경찰이 돼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다. 이건 충격적이지만 매우 현실적이다. 독립운동가 후손은 가난하고 친일파 자손은 부자다.

현재의 중장년층 이상은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그저 나쁘다라고만 주입식으로 배웠다. 노인들은 아예 이념이란 것 자체를 모르고, 그저 옛날에는이라며 아직도 군주제 시대인 줄 착각한다. 그러니 태극기와 성조기를 동일시하고 다카키 마사오를 영웅화한다.

주인공들 중 한 명은 박정희였다. 일본 천황에게 혈서로써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군에게 총질을 해대더니 해방이 되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애국을 외치면서 인권을 부르짖는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독재정권을 유지했던. 학교에서 제대로 못 가르치면 이런 영화라도 계속 만들어야 한다. 1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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