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의 공백’, 블랙코미디로 웃음 주는 ‘인생은 아름다워’
‘13년의 공백’, 블랙코미디로 웃음 주는 ‘인생은 아름다워’
  • 유진모
  • 승인 2019.06.14 0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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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사회적 동물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블랙코미디

 

일본 배우 사이토 타쿠미의 감독 데뷔작 ‘13년의 공백은 보편적 상업영화의 틀을 거부하지만 어렵지 않고 의외의 코미디를 즐길 수 있으며, 감동적이면서도 재미있고, 냉정하면서도 따뜻하다. 마사토(릴리 프랭키)는 요코(칸노 미스즈)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가장인데 노름에 빠져 빚을 졌다.

채권자들을 피해 문을 걸어 잠근 채 싸구려 카레로 연명하며 칩거하던 어느 날 마사토는 요코에게 담배를 산다며 집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는다. 고시엔 구장에 서는 야구선수의 꿈을 키우던 둘째 코지(타카하시 잇세이)는 벽을 상대로 캐치볼을 하며 아버지가 돌아와 제 공을 받아줄 날을 손꼽는다.

엄마는 생계를 위해 새벽에 신문을 돌리고, 낮에 두 아들과 잡일을 하며, 밤에 짙게 화장을 하고 어디론가 나간다. 어느 날 신문 배달 중 교통사고를 당해 눈이 퉁퉁 부은 엄마가 아랑곳없이 밤 외출을 하는 걸 본 두 아들은 다음날 새벽 엄마 대신 신문을 돌리며 일손을 돕다 그렇게 13년이 흘러간다.

대형 광고회사에 다니는 첫째 요시유키(사이토 타쿠미)와 현금수송차 운전을 하는 코지는 오랜만에 엄마의 집에 모인다. 13년 만에 아버지의 소식이 왔는데 위암으로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것. 토론 끝에 코지 혼자 병원에 간다. 며칠 뒤 코지는 연인 사오리(마츠오카 마유)를 데리고 또 간다.

 

병원을 나오는데 사오리는 코지에게 임신 3개월이라고 고백한다. 그렇게 아버지와 예비 시아버지를 보낸 세 사람은 장례식을 치른다. 때마침 옆 장례식장에도 마사토와 성이 같은 자의 장례식이 있어 양측은 확연히 구분된다. 옆은 북적거리는데 마사토의 식장은 정반대라 유가족의 심경은 더 무거운데.

각 영화는 저마다 색이 다양하다. 빨강(하드고어), 노랑(에로), 총천연색(SF 블록버스터) 등으로 분류한다면 이 작품은 잔잔한 구름, 혹은 그 배경인 하늘이다. 마사토는 무능하기 짝이 없다. 코지가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다며 글을 쓴 종이를 내밀자 나중에 읽겠다며 마작에만 몰두할 정도로 무심하다.

거친 채권자의 협박에 집에서 숨도 못 쉬며 자랐고, 아버지의 가출 후 미친 듯 돈벌이에 분주한 엄마를 보다 못해 도우며 성장한 형제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아버지란 존재는 원망뿐이다. 코지는 마사토에게 형이 왜 대기업에 들어갔는지 아세요? 아버지처럼 되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한을 털어놓는다.

영화는 1, 2부로 구성됐다. 현재와 과거를 겹친 1부는 내내 어둡고, 참담하며, 무참하다. 과거는 꿈이 있는 코지만 다르다. 요코는 허무주의적 무채색이고, 요시유키는 분노를 억제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마사토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결국 가출을 택한 무책임이 그의 본질일까?

 

코지는 사오리의 임신 고지에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 미간엔 마사토가 깊게 앉아있다. 그는 또 다른 코지를 낳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아버지보다 나을 게 뭐냐고 자문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론 가족영화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생철학, 즉 존재론을 논제로 한다. 인트로는 화장이란이란 자막이 장식한다.

인간은 화장하는 유일한 동물, 일본에선 99%가 화장을 한다라는 글에 이어 한 소녀가 매미를 화장하는 게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다. 현대의 화장은 위생, 환경, 토지 등 여러 면에서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장려하고 선호하지만 불교 문화권에선 오래전부터 정화, 열반 등의 심오한 종교적 의미로 선행됐다.

영국 장례식엔 ‘Ashes to ashes, dust to dust’(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라는 경구가 있다. 매장 문화권은 계급에 따라 무덤의 규모가 다르지만 화장은 신분고하, 재산유무에 상관없이 대동소이하다. 마사토는 편지에 난 최고의 인생을 자유롭게 살았다라고 썼다. 그의 사상적 지침서는 사르트르다.

사르트르는 모든 외부적 상황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외쳤다. 물론 여기엔 외적 상황이 만드는 개인과 인류에 대한 규정성이란 문제가 생긴다. 또한 자유에는 책임이란 대립항이 있기 마련. 요시유키는 두 장례식장의 사뭇 다른 모양새에 사람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

 

형제는 조문객들의 고인에 대한 추억에 의외로 아버지가 따뜻하고 속이 깊으며 인정 넘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혼란에 휩싸인다. 이기적이고, 무계획적이며, 책임의식이라곤 털끝만치도 없는 무감각한 사람인 줄 알았던 아버지의 현존재와 다른 본래적 존재를 알고 미움과 그리움이 갈등한다.

사르트르로 봤을 때 마사토는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사람이지만 하이데거로 봤을 땐 확실한 존재론적 실존주의자다. 원래부터 있었던 존재는 이타적이고 온화하며 희생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마사토로 태어난 현존재는 척박한 현실을 도저히 감당하지도, 이겨낼 수도 없었기에 잠적을 택한 것이다.

비합리적인 충동적 삶을 중시한 생철학의 사조에 오버랩하면 분트나 니체도 엿보인다. 또 하나의 주제는 꿈이다. 코지가 백일장에서 수상한 글의 제목이 꿈의 구장이다. 유물론적으로 보면 단순히 고시엔, 그리고 거기에서 우승하는 정도겠지만 관념론적으로 펼치면 행복한 가정과 아름다운 세상이다.

1부는 대사가 거의 없는 짧은 쇼트로 불친절하게 펼쳐지지만 2부는 블랙코미디로써 풍부한 웃음을 선사한다. 한 게이가 마사토랑 2년간 살았다라고 고백하고, 한 친구는 고인의 금니를 빼겠다며 니퍼를 꺼내든다. 주인공 잇세이(一生)는 우연의 일치일까? 71분이 매우 아쉽다. 12. 7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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