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학점으로 하는가? [정지윤 칼럼]
공부는 학점으로 하는가? [정지윤 칼럼]
  • 정지윤
  • 승인 2019.04.16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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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와 정서로 쌓는 교양과 학점을 목표로 한 주입식 교육은 달라

 

[정지윤 칼럼] 학교를 마치고 다른 아이들이 영어 학원, 수학 학원 차에 바쁘게 오르내리는 동안 나는 동네 마트 옆 작은 건물 2층으로 올라간다. 신발을 벗고 조금은 투박한 문을 열자마자 먹 냄새와 뭔지 모를 풀 냄새가 은은하게 섞여 코에 들어온다. 학원 안으로 들어서자 화초가 눈에 들어온다.

원장 선생님이 애지중지 키우는 큰 화초는 오늘도 변함없이 약간의 물을 머금고선 싱그럽게 뻗어 있다. 나는 늘 그래왔듯 첫 번째로 그 화초와 눈 맞춤을 하고 방에 들어와 사자소학(四字小學) 책을 꺼낸다. 오늘 할 부분을 공부하고 있으니 원장 선생님이 들어와 내 옆에 앉아 가르침을 주신다.

선생님은 항상 적갈색 생활 한복을 입으셨다. 얼굴에 핀 주름과 약간 까만 피부 때문에 한복을 입으신 선생님의 모습은 마치 나무 같기도 했다. 아니, 실제로 선생님은 나무였다. 곧고 힘차게 뻗은. 한자와 부수를 쓰고 익히는 시간을 마치면 사자소학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의 필체가 묻어나는 사자소학 책을 보면서 따라 읽고 같이 해석을 했다. 한 자, 한 자 붓으로 섬세하게 쓴 한자들은 당시 어린 내가 보았을 때도 일반 한자 책에 인쇄된 것과는 뭔가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선생님은 한자를 외우는 것만큼이나 한자를 쓰는 법에 대해 유독 엄격하셨다.

 

한자 학원에서의 수업은 많은 얘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고전시를 배울 때든 고사성어를 배울 때든 선생님은 하나라도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고사성어에 얽힌 얘기들, 고전시에 얽힌 사연들, 두보와 이백에 대한 많은 사연들을 듣다 보면 어느새 수업 시간이 끝나 있었다.

유독 말이 없는 아이였던 나는 잠자코 선생님의 얘기를 들었고, 선생님은 머리맡에서 옛날얘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나보다 더 즐거워하시며 막힘 없이 술술 얘기를 풀어놓으셨다. 한자 학원에서 나는 특유의 먹 냄새와 화초 냄새가 더해져 그 얘기는 더욱 감칠맛이 났다.

어린 시절 나는 몽롱하게 얘기에 취해 고목나무 같은 원장 선생님의 그늘 아래에서 오후를 보냈다. 학생 수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가끔 서예도 배웠다. 그 때 처음 먹을 갈아보았는데 선생님이 틈날 때마다 먹을 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기서 풍겨오는 냄새와 소리가 좋았기 때문이다.

가끔 떠들썩한 학생들이랑 시간이 겹쳐 함께 수학한 적도 있는데 그 때는 딱 말썽꾸러기 애들이 모여 있는 서당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선생님은 평소 화를 잘 안 내시던 편이었지만 가끔 아이들의 도가 지나치면 매를 들 때도 있었다. 매로 금세 조용해지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3년 동안 매일 가다시피 한 한자 학원을 자격증을 다 따자 그만뒀다. 중학생이 돼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종합학원에 등록했지만 2달도 채 못 가 그만두고 말았다. 수학 학원도 다녀봤지만 역시 두 달 이상을 가지 못했다. 한자 학원과 사뭇 다른 분위기와 압박감에 적응을 못했다.

나는 철저하게 성적 등급으로 나눈 반들과 그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오직 공부만 하는 또래들에게서 괴리감을 느꼈다. 그저께도 나는 어김없이 중국어 수업을 들으러 306호 강의실에 갔다. 처참한 전공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 학점 복구의 수단으로 선택한 이중전공이다.

늘 그래왔듯 피곤한 기분 속에서 교수님이 컴퓨터로 빠르게 입력해주는 중국어를 그대로 받아 적는다. 모니터 속에서 깜빡이는 한자가 아주 딱딱하게 느껴진다. 고전시를 배우는 차례가 오고 교수님은 빠르게 해석을 하고 문법적인 내용에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준다.

잠깐 딴 생각을 하던 나는 해석을 받아 적지 못하고 교수님을 쳐다보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없다. 당황한 나는 고전시를 다시 살펴본다. 어딘가 익숙하다. 8년 전 한자 학원에서 배웠던 시 같다. 족히 몇 십분은 걸려서 들었던 복잡한 사연이 있었던 시 같은데 5분 만에 해석은 끝난다.

원장 선생님이었다면 또 즐겁게 나에게 얘기를 들려주셨겠지. 문득 선생님이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궁금해진다. 아직도 먹을 갈면서 몇 안 되는 애들을 가르치고 계실까? 아니면 학원을 안 하신지 오래 됐을까? 여전히 아이들에게 길고 긴 옛날얘기를 들려주고 있을 상상을 하니 그립다.

갑자기 한자 학원에 가고 싶어졌다. 향긋한 먹 냄새와 큰 화초, 나른한 오후 햇살을 입고 들려오는 고전. A학점을 받기 위해 시를 공부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한자가 좋아 시를 해석했던 어린 시절의 나. 더듬더듬 시를 읽는 소리와 옆에서 조용히 선생님이 먹을 가는 소리가 들리던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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